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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의 삼각형> 결말해석리뷰: 두할배만 구토의미+표정이 왜그래의 폭력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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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의 삼각형> 결말해석리뷰: 두할배만 구토의미+표정이 왜그래의 폭력

ForReal 2023. 5. 18. 2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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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슬픔의 삼각형> 리뷰-해석 포스팅입니다

 

(주의! 영화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 관람하신 후에....!)

 


 

 

 

# "표정이 왜그래?"

: 내면까지 짓게하는 자본

 

  영화 <슬픔의 삼각형>은 남자모델 '칼'(해리스디킨슨 분)로부터 시작합니다. 칼은 남자가 당연히 부담하게 되는 데이트 비용에 대해 따져들고요. 자연스럽게 성역할 문제를 꺼내던 영화가 어떤 성별의 입장에 서있을 지 궁금해하면서 따라가게 합니다. 클리셰가 비틀어진 상황들로부터 다양한 질문을 하게 돕고요.

 

  하지만 3부 속 칼의 역할 역전이 발생한 후 돌아본 영화는 결국 성매수 상황의 성별구도를 깨게 되고, 성역할의 부조리함이 사실 '지위'에서 발생하는 부조리함이었다는 것을 발견하게 합니다.

  성별이 아닌 (자원, 능력, 관계의 차등으로 인해 발생하는) 지위의 문제로 환원되는 것과 같이, 공산당 미국인과 자본주의 러시안을 등장시킨 부분에서도 어떤 국적이나 이념의 기준으로만 결론짓기 가능한 이야기를 하지는 않는 영화라고 느껴지고요.

 

  성별-국적-이념에서 균형있던 영화는, '표정'을 관리당하는 상태의 누군가를 따라가게 한 듯 다가오는데요.

  영화의 제목 '슬픔의 삼각형'이란 단어는 모델 오디션장에서 '표정'을 바꾸라고 할 때 나오는데 미간을 지칭하는 단어입니다. 오디션장면에서는 일을 구하러 온 모델들에게 기분이 나타나기 마련인 '표정'을 고용주가 당연한 듯 컨트롤 하고 이제는 '내면'까지 바꾸라 교묘하게 요구하고 있었죠. 기업의 브랜드룩 주문에 맞게 재빠르게 출력되는 표정의 주인공 칼의 클로즈업과 함께, 자본이 인간성마저 조종하듯이 느껴지고요.

 

  이처럼 영화에선 하위계층, 피지배 상태를 '표정'의 자유도로 보여주는 듯 했는데요. 관계의 '을'인 선박 승무원들도 수영하란 난감한 상황에서 표정을 결코 숨겨야하고, 1부와 3부의 칼-야야(샬비 딘 분) 간 관계 지위가 역전되는 상황에서도 항상 관계의 상위에 있는 사람이 묻습니다 "표정이 왜" 그러냐고.

 

  그렇게 영화 속 인물들이 생존을 위해서 표정을 얼굴 속에 숨기는 모습을 응시하는 화면을 마주하다보면, 생존을 위해서 부조리가 그들의 몸 안의 내부 어딘가에 가두어진듯 다가오기도 합니다. 야야가 칼의 구명정 동침 사실을 알지만 외면하고 프레츨을 먹듯.

  (이런 면에서 부조리로 얻은 음식을 소화시켜내지 못할 때 부조리가 구토와 분뇨로 폭발하고 역류해 나왔다는, 육화의 심상을 연결짓게 되기도 하고요)

 

 

 

# 진실의 구토, 2할배만 귀미테, 왜?

 

  선장 만찬씬에서 저기압에 배가 흔들리자 참으려해도 손님들의 입에서 물줄기가 터져나옵니다.

  화면상 수평선이 변화하는 것으로 시각화되는 것처럼 배라는 체제(이념, 관점, 기준)의 동요가 일어나며 기존의 관점에서 수용했던 것들이 더 이상 소화되지 못하고 껄끄러운 진실이 되어 분출되지요. 1부 속 칼의 질문들처럼 불편한 진실들이 새어나와 버립니다.

 

  사실 배의 흔들림이라는 체제의 혼란은 매번 있어왔을 듯 보였죠. 2부 요트 시작 장면, 부자손님이 오기 전에도 노란 가방의 화면 한 켠에서 선원들은 바닥 청소를 하고 있었지요.

  그를 통해 진실(구토)이 드러난 과거의 위기들에도 불구하고, 반복해서 진실을 닦아내 버텨오던 부패된 사회를 떠올리게 합니다. 하지만 진실을 닦아낸 나무바닥에는 부패를 완벽히 숨길 수 없단 듯 파리 날리고 있죠. 겉으론 안정됐지만 속은 썩은 사회를 보여주듯이요. 게다가 보트 직원 중에서도 하위계급인 아랫층 청소부들의 안정화 노고는 숨겨진 채로요.

 

  그렇게 배의 흔들림이라는 기시스템의 동요 속에서 두 노인(선장과 쉿셀러 디미트리)만 자유로운데요. 아마도 자본주의 리치 러시안 쉿셀러와 공산주의 음악을 들으며 술을 마시는 사회주의자 미국인 선장이기 때문으로 느껴집니다. 그런 평소에도 국가이념에 배반적이던 스탠스가 두 사람의 귀미테(멀미약😅)였을 듯 해요.

  두명의 술 취한 노인이 이념 넘나들며 자유롭게 명언을 주고받듯이, 또 그들의 세계관과 행동양식이 역설적으로 충돌하는 동시에 공존하는 모습에서 보이듯이, 그들은 관점이 다른 두 체제를 이해하고 기존 사회의 경계에 서서 체제가 지우는 아래의 진실을 관조하고 있었기에, 기준선이 바뀌어 배가 좌우로 회전하더라도 난류의 혼란에도 영향받지 않은 것 아닐까요? 현 체제의 기준이 절대적으로 확실하다 확신하는 독단적인 인물들이 아니기 때문에.

 

  술에 취한 두 노인이 마르크스주의 세계관을 마이크에 쏟아부을 때 마치 피하고 싶은 진실이 덮치듯이 분뇨의 류가 배를 뒤덮어가는데요. 가장 강력한 비판을 쏟아낼 때 가장 커다란 변류가 몰아치죠. 그렇게 배가 전복될 절정의 위기에서 물살은 잠시 쉽니다. 손님을 위협하며 선상에서 굴러오던 테이블이 멈추고, 배라는 기존 세계도 지켜낼 수 있을거라 잠시나마 착각하게 만들죠.

  하지만 결국 배라는 현재의 안정을 수류탄이 무너뜨렸죠. 제조자 말로는 민주주의를 지켜냈다는 수류탄이 혹시 정말 공평한 새 세계를 데려오게 될지 궁금해지는데요. 하지만 모두가 '평등'할 수 있을 삼각형의 계급이 사라진 세계인 섬에서, 결국 배로부터 흘러온 구명정처럼 마르크스의 변증법처럼 삼각형이 아기 삼각형체제(?)를 다시 낳게됩니다.

 

 

# 돈 쓰는 곳이 잘못됐다 : 결말해석

 

  3부 섬에서 새로운 방식의 사회가 이뤄지지만 그 속에서도 '운좋게 때와 장소에 맞는' 능력과 자원을 가진 자가 '캡틴'이란 꼭지점이 되고 핸디캡의 인물은 위기에서 소외되면서 또 다른 지위가 발생하게 되죠. 자원의 분배를 해야하는 사회에서는 피할 수 없는 일이라는 듯이 다시 계급이 출현합니다.

 

  새로운 상황 속에서 지위가 뒤바뀐 뒤 마치 교환한듯 반전된 행동을하는 칼&야야의 모순된 모습으로 인해 그들이 1부에서 도덕적인 척 주장하던 평등은 계급적 이익이나 우월함에서 발생한 것일 뿐 확고한 윤리가 아님을 보여주기도 하고요.

  사랑과 생선을 바꾸자는 말이 아름다운 이유를 "진실"되었던 것에서 찾던 애비게일(돌리 드 레온 분) 또한 영화 속 누구나처럼, 예외없단듯이 모순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그녀는 결국 엘레베이터 앞에서 진실을 덮으려하죠. 기득권으로 머무는 현재의 안정된 세계의 유지를 위해서. 자신이 만든 또 다른 새 세계의 부패를 덮어두면서. 배에서 갑판 아래를 경험한 애비게일 조차도 이런 선택을 향하는 모습을 통해 자신의 이익을 지키려는 본능에 따라 그 누구라도 안정과 전복의 싸움을 피해갈 수 없단 점을 드러냅니다.

 

  한편, 마지막 날 아침이 시작되기 전 쉿셀러는 자신을 면도해주는 넬슨에게 막시즘 자본가만이 할 수 있는 듯한 말을 해줍니다. 배 소유자와의 커미션과 여친선물 얘기에 "돈 쓰는 곳이 잘못됐다"고 격차를 만드는 생산수단과 소비에 대해서요.

  이 말은 한편으로, 어떤 방향의 선택을 했어야 할지 누구의 어떤 선택이 잘못된 것이었을까 생각하게 하고 나아가 관객에게 '방향'에 대해 질문케합니다.

 

  리조트였을 뿐이었다는 사실을 보부상을 통해 알게됐지만 전달하지 못하는 '인덴볼켄' 여자로부터 아마 누구도 진실을 전해 듣지 못할 상황에서 돌을 든 애비게일. 그녀에게 비서라는 하위지위를 건네던 야야를 향해 결단한다면 그녀가 꼭짓점인 체제는 다시 청소한 듯 유지될지도 모르는데요.

  이런 이야기의 끝에서 마지막 칼이 필사적으로 뛰어가던 모습은 인상적인 결말을 남깁니다. 과연 그가 '누구에게' 달려가는 것이었을지, 어떤 선택을 할 것이었을지 묻게됩니다. 또 같은 질문을 관객에게 건네죠, 당신이 바라는, 선택하는 결말은 무엇인가 하고. 어떤 시스템을 선택할 것인지 그러면 무엇이 달라질 수 있는지 적극적으로 고민하게 하면서.

 

  늦은 칼에게 애비게일은 체제 밖을 결코 보지 못하게 만들지도. 혹은 칼은 좁은 시야 속에 살다가 아주 늦게야 진실을 알게 되어 구명정의 선택을 후회할지도 모르고, 또 당나귀의 죽음처럼 돌을 한번 내리쳐서는 사냥이 끝나지 않을 가능성의 결말 또한 상상하게도 하죠. 

 

  무엇이든 결말에선 분명하게 엘레베이터와 보부상의 존재가 애비게일의 삼각형 또한 흔들어대고 있는 것과, 어떤 상황에서든 인간사회에서라면 이 슬픔의 삼각형이 반복될 것을 보여주고, 그래서 어쩌면 당신에게 유익하고 동시에 유해한 새 삼각형의 가능성에 대해서까지 꼬리를 물어와, 관객이 영화 초반 비웃었던 패션쇼의 모순을 납득시킵니다. 낙관적 냉소주의와 만나게하며 ...

 


어떤 지위든 계급이든 누구나에게 공평한 점은 모순적이라는 사실과 ..

 

영화 슬픔의 삼각형 리뷰해석 포스팅이었습니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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